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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나는 내 것이 아니다

나를 치유한 하이델베르크 문답

by Kathryn Butler2023-06-04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친구가 어느 날 내게 만성 질환과 보낸 수년의 힘든 싸움을 털어놓았다.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스러운 치료의 연속, 치료의 실패, 그리고 기쁨을 갉아먹는 병과의 지난한 투쟁 과정을 듣는 사이에 내 마음 한구석이 무너졌다. 육신의 고통이 영혼에 미치는 생생한 피해를 목격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어려운 순간에도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매달릴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나는 알고 있어.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사나 죽으나 내 몸과 영혼이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알아.” 


그녀의 또렷한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다름 아니라 수 세기 이어져 내려오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를 아름답게 포착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1번 질문에 대한 답을 내게 들려준 것이다. 그녀와의 대화 후 시간이 지나면서 죄의 삯이 내 삶을 잠식할 때면 또 인간의 타락이 나를 압도할 때면, 나 역시도 그녀의 대답을 되풀이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자기를 버리신 분에게 속했다는 사실로 항상 기뻐할 수 있다(요 10:11; 요일 3:16).


하이델베르크 소망


1500년대 중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폰 데어 팔츠(Friedrich III von der Pfalz)는 여러 개혁파 그룹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한 독일 남서부 지역인 팔츠(Palatinate)를 관장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필리프 멜란히톤의 학생인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에게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되는 기독교 교리의 요점에 대한 체계적인 해설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우르시누스와 여러 기고자가 1563년 봄에 기독교 교리 초판을 완성했다. 비록 그 교리문답이 프리드리히가 희망했던 것처럼 다양한 개신교 운동을 통합하지는 못했지만, 거기에 담긴 복음에 대한 주의 깊고 철저한 설명은 그 이후에 이어진 제자도 사역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교리문답이 끼친 영향력에 대한 증거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은 1619년 도르트 회의 (Synod of Dort)가 이 문서를 (벨직 신앙고백서 및 도르트 신조와 함께)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일치의 세 가지 형식 중 두 번째로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최신 버전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29개의 문답으로 이뤄졌으며, 일 년 동안 매주 공부할 수 있도록 52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내용은 비참함, 구속, 감사의 세 범주에 속하며, 이것은 암기하기 쉽게 G로 시작하는 세 단어 Guilt(죄책), Grace(은혜), Gratitude(감사)로 요약할 수 있다.  


1. 비참함: 인간의 죄 많고 타락한 상태에 대한 노출

2. 구속: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비참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

3. 감사: 구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하는가에 관한 방법 (즉, 우리가 십자가가 준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몸과 영혼, 삶과 죽음


세 가지 주제를 소개하기 위해 교리문답은 전체 내용의 심장에 해당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앞에서 내 친구가 신중하게 인용한 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삶의 돌팔매와 사탄이 쏘는 화살의 공격 속에서도 수많은 성도가 두려워하지 않고 위안을 찾도록 만들었다. 


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진술 다음에 교리문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신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Creeds and Confessions of the United Reformed Churches in North America, 73)


첫 번째 질문은 신자로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형성적인 진리를 분명하고 강력한 언어로 상기시킨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요 8:34, 롬 6:16, 22). 대신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했다. 


유일한 위로


첫 번째 질문을 깊이 숙고할 때,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위로(comfort)라는 단어를 부주의하게 사용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위로에 대한 논의는 종종 포근한 양말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 좋은 책 또는 막 오븐에서 꺼낸 향긋한 쿠키와 같이 물질적인 것을 생각하는 데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진짜 위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포옹, 걱정을 가라앉히며 위안을 주는 소식,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등 물질 너머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오는 위로라는 단어에는 이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의미가 담겨있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이 쓴 것처럼 본문 속 독일어 단어인 트로스트(trost)는 영어 단어 신뢰(trust)와 관련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확실성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The Good News We Almost Forgot, 22). 교리문답이 촉구하는 것은 무엇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줄 것인지가 아니다. 오히려 실존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확신을 찾을 수 있을까? 스스로를 구속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실감할 때, 도대체 어디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을까?


인종으로서 인간의 본성은 이 땅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명도 예외 없이 의미와 안식을 갈망한다.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직업, 관계, 그리고 세상이 주는 정체성에 몰입한다. 소유물과 타인의 찬사가 주는 순간적 희열을 갈망한다. 기분 전환, 산만함, 그리고 심지어 화학적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고통을 무디게 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든 추구는 궁극적인 실패를 가져다줄 뿐이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세상이 주는 기분 전환으로도 한 시간 또는 하루 정도는 상처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기는 다시 곪아 터지고 통증은 영혼 더 깊은 곳까지 침투한다. 참된 위로는 오로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빌 4:7), 모든 시험 중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평안은 오로지 한 분, 세상을 이기신 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요 16:3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서구 사회가 중심이 되어 자아실현을 우상화하는 이 시대에는 매우 급진적이다. 소셜 미디어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감정이라는 지배적인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세상 가르침에 따르면, 나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형성할 뿐 아니라 운명까지 선언하는 임무는 내게 주어졌다. 누구나 다 “최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 따르면 나 자신 외에 나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세상 원칙들이 매혹적일지 모르지만, 죄 많은 세상이 주는 긴장 아래서 하나같이 휘어지고 금이 갈 헛된 원칙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열렬히 개인적 진리를 추구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해도 피할 수도 또 통제할 수도 없는 재난을 만나기 마련이다. 질병을 피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종 질병이 우리를 압도한다.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자연재해는 또 어떤가? 개인적인 죄가 스며들어 소중한 인간관계를 부수기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마음은 찢어진다. 다시 끼워맞출 수도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산산이 부서져 버린 삶의 조각 앞에서 망연자실한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기는커녕, 나를 주인으로 삼으라는 세상의 원칙은 내 마음을 흔들고 필연적으로 파멸로 이끌 뿐이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예 17:9).


세상이 주는 황폐함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는 샘물을 주신다(요 4:14).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평화라는 깊은 의미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가?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지치고 부러지고 또 비바람에 시달린 손으로 시작하거나 끝내는 인간의 위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비틀거리는 나를 예수님이 안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눅 15:4-6).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구원하려는 인간적 노력이 실패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없는 은혜를 부어주신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일 3:1).


나는 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소유물이다(시 100:3; 요 10:11).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무엇도 우리를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7-28; 롬 8:38-39).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하이델베르크의 첫 말씀은 위로의 샘물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제자로 부른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메시지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변치 않는 믿음과 감사를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고전 6:19-20).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진리에 관해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을 따라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잊도록 하자.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우리의 유일하고도 정당한 목표이신 그분을 향한 노력이 되도록 하자. (3.7.1)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이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또 우리 자신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오로지 예수님께 속해 있다. 이 진리는 삶과 죽음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안이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통과하는 유일한 빛이요, 또 어둠이 잠식할 때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다. 이 진리는 망가진 세상에서 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도록 도전한다(롬 14:7-8).



원제: I Am Not My Own: How Heidelberg Healed Me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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